처음에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. 부탁을 들어주고, 기대에 맞춰 행동하고,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 조심하는 것.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조금씩 조정하는 건 사회생활의 일부처럼 느껴진다.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다. 분명 열심히 살고 있는데, 정작 내가 뭘 원하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. 사람들과의 관계는 유지되고 있는데, 나 자신은 점점 흐릿해진다.
타인의 기대에 맞추는 행동은 보통 배려에서 시작된다. 상대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고,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다. 그래서 말투를 고르고, 선택을 미루고, 하고 싶은 말 대신 괜찮다는 말을 먼저 꺼낸다. 이때 중요한 건, 이런 선택들이 한 번에 나를 지우지는 않는다는 점이다. 아주 조금씩, 눈에 띄지 않게 사라지게 만든다.
사람은 반복해서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면, 그 반응을 자신의 성격으로 착각하게 된다. “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”라는 말은 종종 적응의 결과다.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살아온 시간이 길어질수록, 그 기대는 외부의 요구가 아니라 내부의 기준처럼 느껴진다.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누가 요구하지 않아도, 스스로를 그 틀에 맞춘다.
이 구조가 유지되는 이유는 명확하다. 기대에 맞출 때 관계는 비교적 안정적이기 때문이다. 갈등이 줄어들고, 불편한 상황을 피할 수 있다. 대신 그 안정은 조건부다. 내가 기대에 부합할 때만 유지된다. 이 조건을 의식하는 순간, 선택은 점점 자유를 잃는다.
자기가 사라지는 느낌은 대개 갑자기 오지 않는다. 오히려 바쁜 일상 속에서 천천히 드러난다. 쉬는 시간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떠오르지 않거나, 선택 앞에서 늘 다른 사람의 반응부터 생각하게 된다. 이때의 혼란은 “내가 누구지?”라는 질문보다는 “이렇게 해도 괜찮을까?”라는 질문으로 나타난다.
타인의 기대에 맞추는 사람들은 종종 착하다는 평가를 받는다. 하지만 이 평가는 양면적이다. 착하다는 말은 갈등을 만들지 않는다는 뜻이지만, 동시에 자신의 경계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. 경계가 흐려질수록, 나와 타인의 영역은 섞인다. 그 사이에서 ‘나’는 점점 희미해진다.
이 심리는 과거의 경험과도 연결된다. 기대에 부응했을 때 관계가 유지되었고, 그렇지 않을 때 불편함을 겪었다면, 사람은 자연스럽게 기대에 맞추는 방식을 택한다. 이 선택은 생존에 가까운 반응이다. 문제는 그 방식이 지금의 나에게도 여전히 필요한지 돌아보지 않을 때 생긴다.
이 장면을 반복해서 보다 보면, 타인의 기대에 맞추는 삶은 타인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불안을 관리하기 위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. 거절했을 때 생길 수 있는 거리감, 실망, 갈등을 미리 피하려는 시도다. 그래서 이 행동은 이타적이기보다 방어적일 수 있다.
자기가 사라졌다고 느끼는 순간은, 사실 사라진 게 아니라 드러날 기회를 잃어버린 상태에 가깝다.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말할 수 있는 순간들이 계속 미뤄졌을 뿐이다. 그 미룸이 길어질수록, 자신에 대한 감각은 점점 희미해진다.
타인의 기대에 맞추며 살아온 자신을 탓할 필요는 없다. 그 방식은 한때 나를 지켜주었을 가능성이 크다. 다만 지금의 나에게도 여전히 같은 방식이 최선인지, 아니면 이제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해도 괜찮은지는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.
타인의 기대에 맞추다 보면 자기가 사라진다고 느껴질 때, 그 감정은 경고가 아니라 신호에 가깝다. 이제는 나의 기준을 조금 더 앞에 두어도 된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. 관계를 잃지 않기 위해 나를 지워온 시간 뒤에는, 다시 나를 불러낼 차례가 남아 있다.